대동사상의 어제와 오늘 [안병욱 칼럼] > 아시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뒤로가기 아시아

대동사상의 어제와 오늘 [안병욱 칼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6-13 16:12 조회 21 댓글 0

본문

이재명 대통령은 6월4일 당선이 확실해진 뒤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행한 첫 연설에서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공평하게 기회를 함께 누리는 억강부약의 대동세상을 우리 함께 만들어” 가자고 했다. 선거 유세 중에도 자주 대동세상을 언급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도 선거 유세에서 “전봉준의 땅에서부터 함께 사는 대동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대동 용어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개혁 이념과 이상적인 염원을 담는 표현이다. 이 말은 대부분 ‘예기’의 ‘예운편’(禮運編)과 ‘서경’의 ‘홍범’(洪範), 그리고 ‘주역’의 ‘동인괘’(同人卦) 풀이에 연원을 두고 있다. 우선 조선 시대 위정자들은 정책을 논의하고 토론할 때 자기주장을 높이는 수단으로 ‘홍범’의 ‘당신도 같은 의견이고 점괘도 부합하고 고관들과 서민들의 의견도 모두 같게 되면 이것을 대동이라 한다’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혹은 ‘동인괘’의 전(傳)에서 ‘남과 함께하는 자가 천하 대동의 도리로서 하고… 사사로운 바에 매이지 않으면 지극히 공정하고 대동한 도여서 먼 곳도 함께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형통함을 알 수 있다’고 풀이한 것을 내세웠다.

이상사회 지향의 대동사상은 ‘예기’ 예운편에 설명돼 있다. 예운편에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에 공의(公義)가 구현된다고 했다. ‘현명한 자를 지도자로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수여하며 신의와 화목을 가르치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재화를 꼭 개인적으로 저장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일하는 것도 오직 자기만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며, 남을 해치려는 음모가 생기지도 않고 도적이나 난적(亂賊)도 발생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대동이라 한다’고 풀이했다.

조선 사회에서 대동사상으로 나타내고자 한 바는 역대 중국의 이상사회 논의와는 차이가 있었다. 곧 조선 대동론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의식이었다. 당시 조선 지배층은 신분 차별적인 통치체제를 고수하면서 고질적인 폐단들을 미봉책으로 넘기곤 했다. 이 같은 지배층에 맞서 사회 변화에 따른 제도 개혁을 위해 내세운 평등 지향의 이념이 곧 대동이었다. 민중은 과중한 수취와 부역, 심화한 빈부격차, 신분 차별의 불합리한 제도 운영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동 이념을 강조했다.

이런 개혁의식은 공납제 폐단을 혁신한 대동법 창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대동법은 그동안 가호(家戶)에 부과해오던 공납제를 폐지하고 토지세를 신설하여 쌀로 납부하게 하는 새로운 세법이다. 이 제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배층과 세도가들이 결과적으로 그동안 평민들이 납부하던 세금을 대신 부담하게 됐다. 따라서 토지 소유층인 양반 지배층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이에 사회적 인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제도 명칭을 민중이 앞서 대동법으로 호칭하고 나섰다. 정책 당국자들도 처음에는 선혜법으로 부르다가 민중의 의지를 쫓아 뒤늦게 명칭을 대동법으로 변경했다.

뒷날 정조도 ‘대동법이라는 이름은 기자 홍범(洪範)에서 취한 것이며 그런 이름은 옛날 삼대 이전에도 없었고, 삼대 이후에도 없었으며, 중국에도 없던 이름이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의미를 높게 부여했다. 이 같은 사회의식은 비단 공납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았다. 영조 대에는 군역 변통책 마련이 시급한 과제였다. 군역은 평민들만이 부담해온 신분 차별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다. 영조는 군역을 신분 차별을 없애는 호포제로 개혁해서, 위로는 왕자 대군 등 왕족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균등하게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혁신을 영조는 대동론을 앞세워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19세기 초 연기군에서는 양반·평민이 함께 개최한 향회에서 그동안 빈민들이 부당하게 떠맡아 왔던 것을 부민들에게 부담시키기로 했다. 수령은 ‘부민은 원망하고 빈민은 혜택받게 된’ 저간의 논란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면서 이런 해결 방안을 ‘대동’ 또는 ‘대동지역’(大同之役)이라 표현했다. 부민은 ‘토지가 많고 넉넉하게 사는 자’들이고 빈민은 ‘토지가 적고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다. 당시 평민·양반이 함께 향회를 열어 고을의 행정을 논의하는 이념적 기조는 바로 이 대동사상이었다.

대동이란 용어를 누가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따라 그 지향하는 의미가 달랐다. 체제와 정책 비판을 위해서, 때로는 현실의 불가피한 사정을 설명하기 위한 논거로 거론했다. 19세기 농민들은 개별적 논의에서 집단적 저항운동으로 이행하는 시기의 첨예한 사회의식을 대동으로 표방했다. 그렇게 대동론은 사회 변동을 추동하는 이념 구실을 했다. 대동론은 조선 후기 사회 변화를 투영하는 역사의식이었다.

수유리 4·19 묘지에서 진달래 능선을 따라 북한산에 오르다 보면 성벽을 좌우로 거느린 큰 성문을 만난다. 이 성문에 대동문(大同門)이라는 현판이 1980년대 초까지 걸려 있었다. 동쪽으로 난 문을 뜻하는 한자 표기 東(동) 자를 새기지 않고 왜 함께 같이한다는 뜻의 同(동) 자를 사용하였을까. 지금은 물론 그때의 현판은 떼어지고 東(동) 자의 대동문이 걸려 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살인 학살의 계엄군대를 몰아내고 헌혈로 피를 나누어 부상자를 살리고 주먹밥으로 끼니를 함께하면서 해방의 대동세상을 펼쳤다. 1984년 고려대 학생들은 대학 축제 명칭을 그동안의 ‘석탑축전’에서 ‘석탑 대동제’로 바꾸었다. 이를 기점으로 다른 대학들도 행사명에 ‘대동제’를 덧붙인 명칭으로 축제를 진행했다. 당시 대학축제 대동제는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고, 그때부터 대동제는 대학 반정부 시위의 또 다른 표현이 됐다. 이를 빌미로 천박한 위정자들은, 수백년 전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깊은 산속 문루까지 역사의 방향을 가리키며 대동(大同)이라 하던 것까지 왜곡시켜 단순히 동쪽의 문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나는 그 문루 밑을 지날 때마다 늘 죄지은 듯 송구스럽다. 그래도 역사의 방향을 지시하는 그 대동문 현판이 언젠가 다시 걸릴 대동세상을 상상하며 북한산을 오른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소유하신 도메인. All rights reserved.

사이트 정보

회사명 : 회사명 / 대표 : 대표자명
주소 : OO도 OO시 OO구 OO동 123-45
사업자 등록번호 : 123-45-67890
전화 : 02-123-4567 팩스 : 02-123-4568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 OO구 - 123호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정보책임자명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