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팔 만들어 20대에 억만장자로… “게으름은 죄” 창업 또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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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팔 창립 초기의 머스크 - 일론 머스크 현 테슬라 CEO가 페이팔 창립 초기이던 2000년 10월 미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 본사에서 페이팔 로고가 붙은 컴퓨터 모니터 옆에 앉아 미소짓고 있다. 페이팔은 맥스 레브친과 피터 틸이 함께 만든 ‘컨피니티’와 머스크가 세운 ‘X.com’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AP 연합뉴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50]핀테크 시대를 활짝 연 우크라이나 출신 레브친
실리콘벨리에서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의 명성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개발자가 있다. 바로 핀테크 시대를 연 맥스 레브친이다. 동시에 그는 ‘페이팔 마피아’의 탄생 주역이기도 하다.
레브친은 1975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물리학자인 그의 어머니는 사고의 심각성을 알고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레브친은 일리노이 공대에서 컴퓨터 보안을 전공하던 시절에 이미 3번 창업 경험을 쌓았다. 이 가운데 자동화 마케팅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렸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보다는 더 큰 무대인 실리콘밸리에 가서 제대로 창업해보고 싶었다.
레브친은 1998년 스탠퍼드 대학 여름 학기에 헤지펀드 매니저 피터 틸의 강의를 들었다. 신출내기 강사라 학생은 겨우 6명이었다. 레브친은 틸과 점심을 먹으며 본인이 창업할 소형 기기에 암호화된 정보를 저장하는 보안 기술 아이디어를 설명했고, 틸은 투자 의사를 밝혀 공동 창업을 했다. 레브친이 ‘개발’을 맡고 28만달러를 투자한 틸이 ‘경영’을 맡았다. 그들은 6번 실패 끝에 정보를 암호화해서 보낼 수 있다면 돈도 암호화해서 송금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 아이디어가 페이팔의 전신이 되어 세상을 바꾸게 된다. 이로써 이메일 주소만 알면 송금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컨피니티’를 탄생시켰다.
체르노빌 사고 후 우크라서 미국 이민
‘컨피니티’는 편리하고 안전한 온라인 계좌를 제공해 개도국 사람들도 인플레이션에 휘둘리는 자국 통화 이외에 선진국 통화를 쉽게 바꾸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글로벌 디지털 화폐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흥분했다. 게다가 컨피니티의 송금 방식이 혁신적이었다. 한 번만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해 놓으면 언제든지 이메일을 이용해 송금할 수 있어, 개인 정보가 유출되지 않았다. 환율도 알아서 해결해준다. 이른바 금융과 IT의 결합인 ‘핀테크’의 본격 시작이었다.
레브친과 틸이 회사를 키우면서 사람들을 모으는 기준은 하나였다. 같이 즐겁게 일하며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단결력’을 가장 중시했다. 이를 위해 대학 시절 친구들을 페이팔에 합류시켰다. 그들은 지금도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창업자의 성향을 최우선적으로 본다.
그 뒤 빠르게 경쟁사들이 나타났다. 이베이는 ‘빌포인트’를 내놓았고 그 외에도 여러 서비스가 나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론 머스크의 ‘X.com’이었는데 송금 방식이 ‘컨피니티’와 똑같았다. 두 회사는 치열한 경쟁 끝에 2000년 3월 50대50 합병을 단행해 ‘페이팔’이 탄생했다. 당시 창업 주역 15명 중 9명이 유대인이었다. ‘페이팔’은 창업 초기 유대인 케빈 하츠에게 엔젤 투자를 받았다. 그 뒤 골드만삭스 등 투자자들에게 1억달러 투자를 끌어냈다. 이후 페이팔이 이베이에 서비스를 제공하자 입점한 사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때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온라인 송금 업계에 큰 사건이 터진다. 해커들이 허위 정보로 돈을 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해커들 공격으로 힘들기는 페이팔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에 1000만달러를 손해 보기도 했다. 페이팔의 최고기술이사 레브친에게는 절체절명 위기였다. 그는 인턴이던 가우스벡과 해커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기계나 컴퓨터가 아닌 사람 눈으로만 판독이 가능한 숫자판 형태의 테스트다. 그리고 컴퓨터가 스스로 거짓 정보를 식별해 내는 설루션도 발명했다. 이 공로로 MIT는 올해의 발명가로 막스 레브친을 선정했다.
이후 회사는 빠르게 성장해 직원이 220명까지 늘어났다. 2000년 들어 IT 거품 붕괴로 주식시장이 무너졌음에도 페이팔은 2002년 2월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당시 이베이의 맥 휘트먼은 통 큰 유대인답게 페이팔을 15억달러에 사들였다.
이렇게 페이팔 매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젊은 창업가들은 편안히 지내는 길을 택하기보다 다시 새로운 창업에 뛰어들었다. 레브친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괴로웠던 시기가 페이팔을 매각해 거금을 손에 쥔 뒤라고 했다. 처음에는 내면을 찾는 생활을 하자며 1년간 멋진 해변에서 여자 친구와 놀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놀기에는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게으름은 죄’라는 유대인 고유의 죄의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캐피털 회사에 취직했다가 다시 창업의 길로 나섰다.
레브친은 2004년 사진과 동영상 공유 사이트 ‘슬라이드닷컴’을 창업해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그는 또 자기 생일을 맞아 페이팔 동료 16명이 모였을 때, 제러미 스토플먼만이 창업하려는 ‘옐프’(Yelp)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고 바로 다음 날 100만달러를 투자해 맛집 검색 어플을 탄생시켰다. 레브친은 이 밖에도 핀터레스트, 유누들, 위페이 등 10곳이 넘는 회사에 투자했다. 슬라이드닷컴은 2010년 구글에 1억8200만달러에 팔렸다. 그는 2011년부터는 실리콘밸리에 HVF라는 테크 인큐베이터를 세워 스타트업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페이팔이 선불 결제 시스템이라면 레브친은 2012년 특이한 후불 결제 시스템을 선보였다. 곧 신용카드 없이도 물건을 살 수 있는 ‘어펌’(Affirm)을 창업했다. 인공지능 기반 어펌의 플랫폼은 5초 이내에 고객의 신용을 간단히 체크해 소액 대출을 제공하여, 먼저 물건을 사고 나중에 할부로 갚는 방식이다. MZ세대에게 선풍적 인기인 어펌의 시가총액은 40억달러가 넘는다.
다 준비하면 늦는다, 일단 시작하라
페이팔 창업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한 형제처럼 서로 도왔다. 페이팔 출신들은 바쁜 틈을 쪼개어 일주일에 한 번꼴로 모여 서로의 아이디어를 놓고 질문과 토론을 거듭했다. 그들은 아이디어가 좋으면 즉석에서 투자를 결정해 지원했다. 이렇듯 페이팔 문화의 특징은 속전속결의 ‘기민함’에 있었다. 일단 먼저 추진하고, 아니다 싶으면 시장에 민첩하게 대응함으로써 결말을 보았다. 완벽하게 갖추고 나서 시작하면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끈끈한 조직력을 보이자 2007년 11월 경제 전문지 ‘포천’은 페이팔 창업 멤버들을 조명하면서 이들을 ‘페이팔 마피아’라고 불렀다. 서로 도와 밀어주고 당겨주는 끈끈한 결속력이 마치 마피아 같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세운 회사 가운데 10억달러 이상 가치를 가진 유니콘이 무려 8곳이나 된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와 ‘스페이스X’,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의 ‘유튜브’, 리드 호프먼의 ‘링크드인’, 제러미 스토플먼, 러셀 시먼스의 ‘옐프’, 데이비드오 색스의 ‘야머’, 피터 틸의 ‘팰런티어’, 막스 레브친의 ‘어펌’이 그것이다. 그간 페이팔 마피아가 투자한 기업이 646곳이 넘는다.
[중국의 미국 페이팔 모방]
온라인결제 눈뜬 중국, 마윈의 알리페이 포함 전자상거래 폭발적 성장
페이팔은 쉽게 말해 구매자와 판매자의 중간에서 중개해주는 일종의 ‘에스크로(escrow)’ 서비스로, 구매자가 페이팔에 돈을 지불하면 페이팔은 상품이 안전하게 구매자에게 도착한 걸 확인한 뒤 그 돈을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형식이다. 이를 ‘제3자 결제’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에스크로 서비스가 정작 꽃을 피운 곳은 아직 신용 사회가 정착하지 못한 중국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금융 환경이 열악한 후발 개도국이었다. 사기 사건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돈을 먼저 보내고 물건을 나중에 받는 신용 거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용카드조차 정착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에스크로 서비스가 시작되자 비로소 서민들의 온라인 거래가 늘어났다. 이로써 중국은 신용카드 사회를 건너뛰고 곧바로 모바일 결제 시대로 직행할 수 있었다.
2003년 마윈이 이베이와 페이팔을 모방해 ‘타오바오’ 쇼핑몰과 ‘알리페이 결제 시스템’을 만들었다. 금융 후진국 중국에서 신용 결제 시스템이 완성되자 자영업자들이 플랫폼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후 알리바바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로, 알리페이는 세계 최대 핀테크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알리페이 성공 이후 위페이, 유니언페이, 라카라 등 제3자 결제 서비스 회사들이 생겨나 중국이 세계 최대 핀테크 국가가 되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50]핀테크 시대를 활짝 연 우크라이나 출신 레브친
실리콘벨리에서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의 명성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개발자가 있다. 바로 핀테크 시대를 연 맥스 레브친이다. 동시에 그는 ‘페이팔 마피아’의 탄생 주역이기도 하다.
레브친은 1975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물리학자인 그의 어머니는 사고의 심각성을 알고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레브친은 일리노이 공대에서 컴퓨터 보안을 전공하던 시절에 이미 3번 창업 경험을 쌓았다. 이 가운데 자동화 마케팅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렸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보다는 더 큰 무대인 실리콘밸리에 가서 제대로 창업해보고 싶었다.
레브친은 1998년 스탠퍼드 대학 여름 학기에 헤지펀드 매니저 피터 틸의 강의를 들었다. 신출내기 강사라 학생은 겨우 6명이었다. 레브친은 틸과 점심을 먹으며 본인이 창업할 소형 기기에 암호화된 정보를 저장하는 보안 기술 아이디어를 설명했고, 틸은 투자 의사를 밝혀 공동 창업을 했다. 레브친이 ‘개발’을 맡고 28만달러를 투자한 틸이 ‘경영’을 맡았다. 그들은 6번 실패 끝에 정보를 암호화해서 보낼 수 있다면 돈도 암호화해서 송금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 아이디어가 페이팔의 전신이 되어 세상을 바꾸게 된다. 이로써 이메일 주소만 알면 송금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컨피니티’를 탄생시켰다.
체르노빌 사고 후 우크라서 미국 이민
‘컨피니티’는 편리하고 안전한 온라인 계좌를 제공해 개도국 사람들도 인플레이션에 휘둘리는 자국 통화 이외에 선진국 통화를 쉽게 바꾸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글로벌 디지털 화폐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흥분했다. 게다가 컨피니티의 송금 방식이 혁신적이었다. 한 번만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해 놓으면 언제든지 이메일을 이용해 송금할 수 있어, 개인 정보가 유출되지 않았다. 환율도 알아서 해결해준다. 이른바 금융과 IT의 결합인 ‘핀테크’의 본격 시작이었다.
레브친과 틸이 회사를 키우면서 사람들을 모으는 기준은 하나였다. 같이 즐겁게 일하며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단결력’을 가장 중시했다. 이를 위해 대학 시절 친구들을 페이팔에 합류시켰다. 그들은 지금도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창업자의 성향을 최우선적으로 본다.
그 뒤 빠르게 경쟁사들이 나타났다. 이베이는 ‘빌포인트’를 내놓았고 그 외에도 여러 서비스가 나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론 머스크의 ‘X.com’이었는데 송금 방식이 ‘컨피니티’와 똑같았다. 두 회사는 치열한 경쟁 끝에 2000년 3월 50대50 합병을 단행해 ‘페이팔’이 탄생했다. 당시 창업 주역 15명 중 9명이 유대인이었다. ‘페이팔’은 창업 초기 유대인 케빈 하츠에게 엔젤 투자를 받았다. 그 뒤 골드만삭스 등 투자자들에게 1억달러 투자를 끌어냈다. 이후 페이팔이 이베이에 서비스를 제공하자 입점한 사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때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온라인 송금 업계에 큰 사건이 터진다. 해커들이 허위 정보로 돈을 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해커들 공격으로 힘들기는 페이팔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에 1000만달러를 손해 보기도 했다. 페이팔의 최고기술이사 레브친에게는 절체절명 위기였다. 그는 인턴이던 가우스벡과 해커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기계나 컴퓨터가 아닌 사람 눈으로만 판독이 가능한 숫자판 형태의 테스트다. 그리고 컴퓨터가 스스로 거짓 정보를 식별해 내는 설루션도 발명했다. 이 공로로 MIT는 올해의 발명가로 막스 레브친을 선정했다.
이후 회사는 빠르게 성장해 직원이 220명까지 늘어났다. 2000년 들어 IT 거품 붕괴로 주식시장이 무너졌음에도 페이팔은 2002년 2월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당시 이베이의 맥 휘트먼은 통 큰 유대인답게 페이팔을 15억달러에 사들였다.
이렇게 페이팔 매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젊은 창업가들은 편안히 지내는 길을 택하기보다 다시 새로운 창업에 뛰어들었다. 레브친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괴로웠던 시기가 페이팔을 매각해 거금을 손에 쥔 뒤라고 했다. 처음에는 내면을 찾는 생활을 하자며 1년간 멋진 해변에서 여자 친구와 놀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놀기에는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게으름은 죄’라는 유대인 고유의 죄의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캐피털 회사에 취직했다가 다시 창업의 길로 나섰다.
레브친은 2004년 사진과 동영상 공유 사이트 ‘슬라이드닷컴’을 창업해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그는 또 자기 생일을 맞아 페이팔 동료 16명이 모였을 때, 제러미 스토플먼만이 창업하려는 ‘옐프’(Yelp)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고 바로 다음 날 100만달러를 투자해 맛집 검색 어플을 탄생시켰다. 레브친은 이 밖에도 핀터레스트, 유누들, 위페이 등 10곳이 넘는 회사에 투자했다. 슬라이드닷컴은 2010년 구글에 1억8200만달러에 팔렸다. 그는 2011년부터는 실리콘밸리에 HVF라는 테크 인큐베이터를 세워 스타트업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페이팔이 선불 결제 시스템이라면 레브친은 2012년 특이한 후불 결제 시스템을 선보였다. 곧 신용카드 없이도 물건을 살 수 있는 ‘어펌’(Affirm)을 창업했다. 인공지능 기반 어펌의 플랫폼은 5초 이내에 고객의 신용을 간단히 체크해 소액 대출을 제공하여, 먼저 물건을 사고 나중에 할부로 갚는 방식이다. MZ세대에게 선풍적 인기인 어펌의 시가총액은 40억달러가 넘는다.
다 준비하면 늦는다, 일단 시작하라
페이팔 창업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한 형제처럼 서로 도왔다. 페이팔 출신들은 바쁜 틈을 쪼개어 일주일에 한 번꼴로 모여 서로의 아이디어를 놓고 질문과 토론을 거듭했다. 그들은 아이디어가 좋으면 즉석에서 투자를 결정해 지원했다. 이렇듯 페이팔 문화의 특징은 속전속결의 ‘기민함’에 있었다. 일단 먼저 추진하고, 아니다 싶으면 시장에 민첩하게 대응함으로써 결말을 보았다. 완벽하게 갖추고 나서 시작하면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끈끈한 조직력을 보이자 2007년 11월 경제 전문지 ‘포천’은 페이팔 창업 멤버들을 조명하면서 이들을 ‘페이팔 마피아’라고 불렀다. 서로 도와 밀어주고 당겨주는 끈끈한 결속력이 마치 마피아 같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세운 회사 가운데 10억달러 이상 가치를 가진 유니콘이 무려 8곳이나 된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와 ‘스페이스X’,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의 ‘유튜브’, 리드 호프먼의 ‘링크드인’, 제러미 스토플먼, 러셀 시먼스의 ‘옐프’, 데이비드오 색스의 ‘야머’, 피터 틸의 ‘팰런티어’, 막스 레브친의 ‘어펌’이 그것이다. 그간 페이팔 마피아가 투자한 기업이 646곳이 넘는다.
[중국의 미국 페이팔 모방]
온라인결제 눈뜬 중국, 마윈의 알리페이 포함 전자상거래 폭발적 성장
페이팔은 쉽게 말해 구매자와 판매자의 중간에서 중개해주는 일종의 ‘에스크로(escrow)’ 서비스로, 구매자가 페이팔에 돈을 지불하면 페이팔은 상품이 안전하게 구매자에게 도착한 걸 확인한 뒤 그 돈을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형식이다. 이를 ‘제3자 결제’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에스크로 서비스가 정작 꽃을 피운 곳은 아직 신용 사회가 정착하지 못한 중국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금융 환경이 열악한 후발 개도국이었다. 사기 사건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돈을 먼저 보내고 물건을 나중에 받는 신용 거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용카드조차 정착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에스크로 서비스가 시작되자 비로소 서민들의 온라인 거래가 늘어났다. 이로써 중국은 신용카드 사회를 건너뛰고 곧바로 모바일 결제 시대로 직행할 수 있었다.
2003년 마윈이 이베이와 페이팔을 모방해 ‘타오바오’ 쇼핑몰과 ‘알리페이 결제 시스템’을 만들었다. 금융 후진국 중국에서 신용 결제 시스템이 완성되자 자영업자들이 플랫폼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후 알리바바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로, 알리페이는 세계 최대 핀테크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알리페이 성공 이후 위페이, 유니언페이, 라카라 등 제3자 결제 서비스 회사들이 생겨나 중국이 세계 최대 핀테크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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