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유럽’ 구제한 최초 여성·동독 출신·최장수 총리 메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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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9-26 15:27 조회 2,897 댓글 0본문
(위)앙겔라 메르켈이 2005년 11월22일 베를린 연방하원에서 노어베르트 람메르트 당시 독일연방하원의회 의장 앞에서 독일 총리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아래)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8년 6월9일 캐나다 샤를부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 중 탁자를 양손으로 누르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호무역주의와 관세장벽을 배격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 채택을 두고 갈등을 벌이던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냉냉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티이미지
막 내리는 메르켈 시대
‘위기의 유럽’ 구제한 최초 여성·동독 출신·최장수 총리 메르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의 16년 집권이 26일(현지시간) 총선 후 막을 내린다. 연립정부 구성에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이번 총선으로 메르켈 총리의 후임은 결정된다.
메르켈 총리가 걷는 길은 모두 새로운 역사였다. 그는 최초 여성 총리이자 동독·과학자 출신 총리였고, 이제 헬무트 콜 전 총리와 더불어 독일 최장수 총리가 됐다. 51세에 역대 최연소 나이로 취임했으며 독일 역사상 자발적으로 퇴장한 첫 총리이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는 11년간 재임한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에 이어 역사적인 여성 국가 지도자로도 평가받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2000년대 후반 세계 금융위기와 그리스발 유로존 위기, 2010년대 시리아 난민 유입 사태와 코로나19 대유행을 극복했다. 대외적으로는 유럽과 미국, 중국 간의 지정학적 관계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리당략보다는 정책의 실용성에 집중하며 나라를 이끌어 임기 후반까지도 시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다.
■동독 출신으로 기민당 대표까지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둘로 갈라져있던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메르켈 총리가 태어난 지 몇주 지나지 않아 동독 브란덴부르크로 이사했다. 메르켈 총리의 부친 앙겔라 카스너 목사의 목회를 위해서였다. 사회주의 사회였던 동독에서 그가 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사회주의의 획일적 이념교육으로부터 벗어나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훈련시켰다. 메르켈 총리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것도 “(자연과학에 대한) 진실은 쉽게 왜곡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메르켈 총리는 1989년 동독 야당 민주약진(DA)에 가입하고, 동독의 마지막 총리 로타 드 메지에르의 대변인으로 발탁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독일 통일이 이뤄진 1990년 DA와 독일사회연합이 기민당에 흡수되면서 그는 자연스레 기민당원이 됐다. 그는 헬무트 콜 총리의 발탁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콜의 양녀’로 불리며 1991년 여성청소년부 장관, 1994년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기민당 사무총장직을 거쳐 2000년 당시 야당이었던 기민당의 첫 여성 대표로 선출됐다. 이후 2005년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대연정에 성공하며 독일 총리로 취임하며 15년간 초고속 성공 가도를 달렸다.
■위기에 빠진 유럽을 구하다
메르켈 총리는 임기 동안 독일과 유럽연합(EU)의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어닥쳤을 때 ‘뱅크런’을 막기 위해 4800억유로의 대규모 구제금융을 편성하고 “여러분의 예금은 안전할 것”이라며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이듬해 독일 국내총생산(GDP)이 5.7%가 감소하긴 했지만 실업률은 0.22%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09년 그리스 정부의 재정적자로 시작된 유로존 금융위기 당시 메르켈 총리는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며 유로존 국가들에 강력한 구조개혁과 긴축정책을 압박했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그리스 시민들은 메르켈 총리를 비판했지만 유럽은 유로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수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2015년 시리아 난민들이 대거 유럽으로 넘어왔을 때 메르켈 총리는 100만명에 달하는 난민 수용을 결정했다. 유럽국들이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은 난민 유입의 보루가 됐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우리가 국경에서 거부한다면 독일은 더이상 나의 조국이 아니다”고 연설했다. 하지만 독일 내부 여론은 좋지 않았고 여당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2017년 총선 결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제3당으로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메르켈 총리의 임기 말 최대 과제는 코로나19 대유행 극복이었다. 그는 지난해 3월 대국민 연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라며 시민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시키고, 공공시설 및 일반 상점 운영 금지 등 초기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메르켈 총리는 대규모 예산 편성에 반대하는 국가 정상들을 일일히 설득하며 EU의 7500억유로 규모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미국과는 ‘거리 두기’, 중국과는 가깝게
메르켈 총리는 재임 초기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며 미국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메르켈 총리를 가장 중요한 외교 파트너로 꼽았다. 하지만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EU와의 무역전쟁을 일으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와 충돌하면서 점점 미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2017년 3선에 도전했던 메르켈 총리는 “우리(독일과 유럽)가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며 유럽이 독자 노선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메르켈 총리가 민주주와 법치 존중 등의 가치를 미국과 공유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경제를 미국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중국과 손을 잡았다. 지난해 독일의 대중국 수출액은 1100억달러에 이르렀고, 약 5000개의 독일 기업이 중국에 진출해 있다. 재임기간 13번 중국을 방문한 그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도 재계 인사들을 이끌고 방중해 경협을 논의했다. 미국이 중국 기업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다른 나라들에 압박을 넣었을 때 독일은 화웨이 사용을 허용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독일은 중국 당국의 인권 침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화를 내는 척했지만 양국의 경제 협력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필요할 때면 협력했다.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구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탈원전 정책에 따른 천연 에너지를 조달을 위해 2015년 시작한 노드스트림2 가스관 사업은 꿋꿋이 진행했다. 그는 2008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를 가입시키려 할 때도 유럽 정세가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해 반대 의사를 강력히 표명했고, 당시 푸틴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메르켈 총리는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고개를 숙였다. 독일 정치인들이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 방문하기를 꺼렸던 다하우 강제수용소에도 총리 중 최초로 찾아가 참배했다. 메르켈 총리는 홀로코스트라는 말 대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쇼아(재앙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쓰는 등 단어 선택에도 신경썼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다”고 말했다.
■‘정치판’을 ‘정책 토론의 장’으로
메르켈 총리의 실용주의와 포용성은 그가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철의 여인’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뚜렷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매트 포트러프 영국 코벤트리 대학교 정치과학과 교수는 메르켈 총리가 당리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판을 정책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메르켈 총리는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면 야당 정책도 수용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2011년에는 사민당의 탈원전 의제를 수용해 2022년까지 탈원전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2010년 모병제 전환, 2014년 연금수령 나이 하향, 2015년 최저임금 법제화 등도 야당의 정책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는 계파정치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성과가 없거나, 비위에 휩싸인 고위직 인사들에 대해 눈을 감지 않았다. 메르켈 총리는 자신을 정치인으로 대성하도록 도와준 콜 총리가 1999년 비리 의혹에 휩싸이자 바로 “콜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기민당에 큰 피해 입혔다”는 성명을 내놓았고 끝내 콜은 사임했다. 실패로 끝난 유럽 위성항법시스템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주도한 볼프강 티펜제 교통부 장관 등 기민당 소속 장관들을 가차없이 해임했다.
정책을 결정할 때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점은 메르켈 총리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꼽힌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장도 표명하지 않는 그를 두고 ‘메르켈하다’(merkeln)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 독일 언론인 슈테판 코르넬리우스는 이를 두고 메르켈 총리가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계획을 세운 뒤 대응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퇴임 이후 정치 활동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지지율은 높다. 지난달 독일 공영방송 ARD 여론조사 결과 메르켈 총리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은 75%에 달했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22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6개 부유국 시민들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74%)이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61%),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20%) 등 보다 메르켈 총리(77%)를 가장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8년 6월9일 캐나다 샤를부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 중 탁자를 양손으로 누르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호무역주의와 관세장벽을 배격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 채택을 두고 갈등을 벌이던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냉냉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티이미지
막 내리는 메르켈 시대
‘위기의 유럽’ 구제한 최초 여성·동독 출신·최장수 총리 메르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의 16년 집권이 26일(현지시간) 총선 후 막을 내린다. 연립정부 구성에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이번 총선으로 메르켈 총리의 후임은 결정된다.
메르켈 총리가 걷는 길은 모두 새로운 역사였다. 그는 최초 여성 총리이자 동독·과학자 출신 총리였고, 이제 헬무트 콜 전 총리와 더불어 독일 최장수 총리가 됐다. 51세에 역대 최연소 나이로 취임했으며 독일 역사상 자발적으로 퇴장한 첫 총리이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는 11년간 재임한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에 이어 역사적인 여성 국가 지도자로도 평가받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2000년대 후반 세계 금융위기와 그리스발 유로존 위기, 2010년대 시리아 난민 유입 사태와 코로나19 대유행을 극복했다. 대외적으로는 유럽과 미국, 중국 간의 지정학적 관계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리당략보다는 정책의 실용성에 집중하며 나라를 이끌어 임기 후반까지도 시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다.
■동독 출신으로 기민당 대표까지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둘로 갈라져있던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메르켈 총리가 태어난 지 몇주 지나지 않아 동독 브란덴부르크로 이사했다. 메르켈 총리의 부친 앙겔라 카스너 목사의 목회를 위해서였다. 사회주의 사회였던 동독에서 그가 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사회주의의 획일적 이념교육으로부터 벗어나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훈련시켰다. 메르켈 총리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것도 “(자연과학에 대한) 진실은 쉽게 왜곡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메르켈 총리는 1989년 동독 야당 민주약진(DA)에 가입하고, 동독의 마지막 총리 로타 드 메지에르의 대변인으로 발탁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독일 통일이 이뤄진 1990년 DA와 독일사회연합이 기민당에 흡수되면서 그는 자연스레 기민당원이 됐다. 그는 헬무트 콜 총리의 발탁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콜의 양녀’로 불리며 1991년 여성청소년부 장관, 1994년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기민당 사무총장직을 거쳐 2000년 당시 야당이었던 기민당의 첫 여성 대표로 선출됐다. 이후 2005년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대연정에 성공하며 독일 총리로 취임하며 15년간 초고속 성공 가도를 달렸다.
■위기에 빠진 유럽을 구하다
메르켈 총리는 임기 동안 독일과 유럽연합(EU)의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어닥쳤을 때 ‘뱅크런’을 막기 위해 4800억유로의 대규모 구제금융을 편성하고 “여러분의 예금은 안전할 것”이라며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이듬해 독일 국내총생산(GDP)이 5.7%가 감소하긴 했지만 실업률은 0.22%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09년 그리스 정부의 재정적자로 시작된 유로존 금융위기 당시 메르켈 총리는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며 유로존 국가들에 강력한 구조개혁과 긴축정책을 압박했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그리스 시민들은 메르켈 총리를 비판했지만 유럽은 유로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수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2015년 시리아 난민들이 대거 유럽으로 넘어왔을 때 메르켈 총리는 100만명에 달하는 난민 수용을 결정했다. 유럽국들이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은 난민 유입의 보루가 됐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우리가 국경에서 거부한다면 독일은 더이상 나의 조국이 아니다”고 연설했다. 하지만 독일 내부 여론은 좋지 않았고 여당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2017년 총선 결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제3당으로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메르켈 총리의 임기 말 최대 과제는 코로나19 대유행 극복이었다. 그는 지난해 3월 대국민 연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라며 시민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시키고, 공공시설 및 일반 상점 운영 금지 등 초기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메르켈 총리는 대규모 예산 편성에 반대하는 국가 정상들을 일일히 설득하며 EU의 7500억유로 규모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미국과는 ‘거리 두기’, 중국과는 가깝게
메르켈 총리는 재임 초기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며 미국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메르켈 총리를 가장 중요한 외교 파트너로 꼽았다. 하지만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EU와의 무역전쟁을 일으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와 충돌하면서 점점 미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2017년 3선에 도전했던 메르켈 총리는 “우리(독일과 유럽)가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며 유럽이 독자 노선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메르켈 총리가 민주주와 법치 존중 등의 가치를 미국과 공유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경제를 미국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중국과 손을 잡았다. 지난해 독일의 대중국 수출액은 1100억달러에 이르렀고, 약 5000개의 독일 기업이 중국에 진출해 있다. 재임기간 13번 중국을 방문한 그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도 재계 인사들을 이끌고 방중해 경협을 논의했다. 미국이 중국 기업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다른 나라들에 압박을 넣었을 때 독일은 화웨이 사용을 허용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독일은 중국 당국의 인권 침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화를 내는 척했지만 양국의 경제 협력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필요할 때면 협력했다.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구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탈원전 정책에 따른 천연 에너지를 조달을 위해 2015년 시작한 노드스트림2 가스관 사업은 꿋꿋이 진행했다. 그는 2008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를 가입시키려 할 때도 유럽 정세가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해 반대 의사를 강력히 표명했고, 당시 푸틴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메르켈 총리는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고개를 숙였다. 독일 정치인들이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 방문하기를 꺼렸던 다하우 강제수용소에도 총리 중 최초로 찾아가 참배했다. 메르켈 총리는 홀로코스트라는 말 대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쇼아(재앙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쓰는 등 단어 선택에도 신경썼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다”고 말했다.
■‘정치판’을 ‘정책 토론의 장’으로
메르켈 총리의 실용주의와 포용성은 그가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철의 여인’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뚜렷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매트 포트러프 영국 코벤트리 대학교 정치과학과 교수는 메르켈 총리가 당리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판을 정책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메르켈 총리는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면 야당 정책도 수용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2011년에는 사민당의 탈원전 의제를 수용해 2022년까지 탈원전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2010년 모병제 전환, 2014년 연금수령 나이 하향, 2015년 최저임금 법제화 등도 야당의 정책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는 계파정치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성과가 없거나, 비위에 휩싸인 고위직 인사들에 대해 눈을 감지 않았다. 메르켈 총리는 자신을 정치인으로 대성하도록 도와준 콜 총리가 1999년 비리 의혹에 휩싸이자 바로 “콜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기민당에 큰 피해 입혔다”는 성명을 내놓았고 끝내 콜은 사임했다. 실패로 끝난 유럽 위성항법시스템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주도한 볼프강 티펜제 교통부 장관 등 기민당 소속 장관들을 가차없이 해임했다.
정책을 결정할 때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점은 메르켈 총리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꼽힌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장도 표명하지 않는 그를 두고 ‘메르켈하다’(merkeln)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 독일 언론인 슈테판 코르넬리우스는 이를 두고 메르켈 총리가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계획을 세운 뒤 대응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퇴임 이후 정치 활동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지지율은 높다. 지난달 독일 공영방송 ARD 여론조사 결과 메르켈 총리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은 75%에 달했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22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6개 부유국 시민들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74%)이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61%),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20%) 등 보다 메르켈 총리(77%)를 가장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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