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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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4-01 17:48 조회 583 댓글 0본문
춘우(春雨) - 봄비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춘우세불적 야중미유성
봄비방울 안개인양 가늘더니 밤이깊자 자그맣게 소리들리네
雪盡南溪漲 草芽多少生
설진남계창 초아다소생
눈녹아 남쪽시냇물 불어나면 나물새싹 여기저기 돋아나겠네.
부적(不滴) ; 적(滴)은 물방울. 물방울을 이루지 못함.
물방울을 이루면 빗방울, 이루지 못하면 안개.
유성(有聲) ; 소리가 있음은 소리가 들림이지.
글로서는 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빗방울이 조금 굵어졌다는 말.
창(漲) ; 물이불어 범람함.
초아(草芽) ; 풀의 새싹. 여기서 초(草)를 풀로 풀면 직역. 나물로 풀면 의역.
다소(多少) ; 꽤나, 적지않게 많이.
안개가 내려앉는 듯 봄비가 슬금슬금 내리고 있다.
옷 젖는 줄 모르게 내리는 비. 밤이 깊어가니 빗방울이 굵어졌는지 지붕을 간지리는 소리가 들린다. 겨우내 흐름을 멈추었던 남쪽 시내에 눈 녹은 물이 흘러가는 소리?
굳이 따질 것 없다. 그것은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만물들이 꿈틀대며 소생하는 소리일수도 있는걸. 아니면 봄비에 땅이 녹아 기지개 켜는 소리일수도 있겠다.
겨울잠을 자던 풀이며 나무며 뿌리들이 아 ! 잘 잤다. 이제 땅위로 올라가 볼까?
하는 소리겠지.
내 몸에도 더운 피가 돌고, 얼음장 밑으론 시냇물이 돌고,
굳은 땅 비집고 새싹이 올라온다.
깊은 밤 홀로 깨어 듣는 이 소리가 이다지도 고맙다.
정몽주(鄭夢周)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도모했다.
그리고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에는 고려의 기존 법률 체계와 원나라의 법률,
1367년에 새로 제정된 《대명률(大明律)》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려 했다.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출처] 춘우(春雨) - 봄비|작성자 소암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춘우세불적 야중미유성
봄비방울 안개인양 가늘더니 밤이깊자 자그맣게 소리들리네
雪盡南溪漲 草芽多少生
설진남계창 초아다소생
눈녹아 남쪽시냇물 불어나면 나물새싹 여기저기 돋아나겠네.
부적(不滴) ; 적(滴)은 물방울. 물방울을 이루지 못함.
물방울을 이루면 빗방울, 이루지 못하면 안개.
유성(有聲) ; 소리가 있음은 소리가 들림이지.
글로서는 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빗방울이 조금 굵어졌다는 말.
창(漲) ; 물이불어 범람함.
초아(草芽) ; 풀의 새싹. 여기서 초(草)를 풀로 풀면 직역. 나물로 풀면 의역.
다소(多少) ; 꽤나, 적지않게 많이.
안개가 내려앉는 듯 봄비가 슬금슬금 내리고 있다.
옷 젖는 줄 모르게 내리는 비. 밤이 깊어가니 빗방울이 굵어졌는지 지붕을 간지리는 소리가 들린다. 겨우내 흐름을 멈추었던 남쪽 시내에 눈 녹은 물이 흘러가는 소리?
굳이 따질 것 없다. 그것은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만물들이 꿈틀대며 소생하는 소리일수도 있는걸. 아니면 봄비에 땅이 녹아 기지개 켜는 소리일수도 있겠다.
겨울잠을 자던 풀이며 나무며 뿌리들이 아 ! 잘 잤다. 이제 땅위로 올라가 볼까?
하는 소리겠지.
내 몸에도 더운 피가 돌고, 얼음장 밑으론 시냇물이 돌고,
굳은 땅 비집고 새싹이 올라온다.
깊은 밤 홀로 깨어 듣는 이 소리가 이다지도 고맙다.
정몽주(鄭夢周)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도모했다.
그리고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에는 고려의 기존 법률 체계와 원나라의 법률,
1367년에 새로 제정된 《대명률(大明律)》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려 했다.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출처] 춘우(春雨) - 봄비|작성자 소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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